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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보다 먼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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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회사 블로그에 써놓은 포스팅을 티스토리에 옮겨 놓은 글입니다. 글 외에 동료들이 남긴 댓글도 모두 옮겨 놓았습니다. 동료들의 이름 대신 A, B, C 와 같이 이니셜을 써서요. 회사 블로그는 임직원 외에 외부인은 볼 수가 없고, 제가 언젠가는 회사에 다니지 않게 될 때 볼 수가 없을 듯 해서 이렇게 옮겨 봅니다 :)   

 

(나에게 많은 생각과 기회를 주었던 싱글 블로그. 내가 요즘 너무 등한시했던 생각이 들었다. 11월부터는 매주 1개씩이라도 꾸준히 글을 올리며 다시 예전처럼 관심을 가지려 한다. ^^ 스스로 다짐)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의 해프닝

출근길에 듣는 '손석희의 시선집중' 어제 방송에 손석희 교수가 지각을 했다.시작부터 여자 아나운서가 대신하다가 1시간이 지나서야 손 교수가 진행을 했다.

 

   "조금 늦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께 양해말씀드리겠습니다."

 

자세한 설명도 없이 투박한 사과만 하고 평소처럼 방송을 진행했다.폭설과 한파 등 피치 못할 사정으로 한 번씩 지각한 거 외에는 12년만에 처음있는 일이란다.

 

오늘 쓰고자 하는 것은 손석희의 지각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기사이다.어느 방송의 진행자가 지각한 게 뉴스꺼리가 되는 것도 신기했지만,그 기사의 붙은 리플들이 더 신기했다.

 

http://news.nate.com/view/20121030n08362?mid=e0103

 

300여 개가 가까운 리플들이 어쩜 그리 하나같이 다 따뜻(?)한 말들뿐일까?요즘 이유도 없이 악플을 남발하고 시비 거는 덧글 세태에서 보니 더욱 신선하다.

 

  "손교수도 지각을 하시는군요. 인간적으로 보여서 좋아요!"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좀 더 정감이 가네요!"

 

삼성SDS 다니는 조세형 차장이 지난 달에 이어 오늘도 아침 출근길에 지각을 했다고 치자.상사에게 이런 멘트를 들을 수 있을까? 꿈에라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

 

  "조차장도 지각을 하는군.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줘서 고맙네!"

 

 

 

 

 

 

 

 

 

나 자신보다 먼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바로 '평판'

어떻게 살면 지각을 해도 이런 리플을 받을 수 있을까 잠시 생각하다가,그게 바로 <평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평판은 <평소 모습의박이>이다. 내가 평소에 어떤 행동과 말을 했냐의 결과가 바로 평판이다.

 

개개인의 호불호가 있을테니 굳이 손교수의 평판을 훌륭하네 어쩌네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하지만 이러한 지각 해프닝 상황에서 그의 평판을 조금은 짐작케 된다.

 

나 자신보다 먼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바로 평판이다. 손석희 교수 이야기가 나온 김에 예전에 손 교수가 직접 쓴 글을 하나 적으며 오늘 글은 마무리한다.아주 가끔 이 글을 보면서 내가 좋아서 늦게 시작한 '그 일'이 늦은게 아니구나라고 안도하기도 한다.(아래글의 손석희 교수가 고민하는 그 나이 즈음이라서 더더욱~~ ^^)

 

 

 

 

    손석희의 지각인생 (손석희 씀)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내가 지각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도 남보다 늦었고 사회진출도, 결혼도 남들보다 짧게는 1년,길게는 3∼4년 정도 늦은 편이었다. 능력이 부족했거나 다른 여건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이렇게 늦다 보니 내게는 조바심보다 차라리 여유가 생긴 편인데, 그래서인지 시기에 맞지 않거나 형편에 맞지 않는 일을 가끔 벌이기도 한다.

 

내가 벌인 일 중 가장 뒤늦고도 내 사정에 어울리지 않았던 일은 나이 마흔을 훨씬 넘겨 남의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결정한 일일 것이다. 1997년 봄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서 나는 정식으로 학교를 다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어느 재단으로부터 연수비를 받고 가는 것도 아니었고 직장생활 십수년 하면서 마련해 두었던 알량한 집 한채 전세 주고 그 돈으로 떠나는 막무가내식 자비 연수였다. 그 와중에 공부는 무슨 공부.

 

학교에 적은 걸어놓되 그저 몸 성히 잘 빈둥거리다 오는 것이 내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졸지에 현지에서 토플 공부를 하고 나이 마흔 셋에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된 까닭은 뒤늦게 한 국제 민간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얻어낸 탓이 컸지만, 기왕에 늦은 인생, 지금에라도 한 번 저질러 보자는 심보도 작용한 셈이었다. 미네소타 대학의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연구실 구석에 처박혀 낮에는 식은 도시락 까먹고, 저녁에는 근처에서 사온 햄버거를 꾸역 거리며 먹을 때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내 연배들을 생각하면서 다 늦게 무엇 하는 짓인가 하는 후회도 했다.

 

20대의 팔팔한 미국 아이들과 경쟁하기에는 나는 너무 연로(?)해 있었고 그 덕에 주말도 없이 매일 새벽 한두시까지 그 연구실에서 버틴 끝에 졸업이란 것을 했다.

 

돌이켜 보면 그때 나는 무모했다. 하지만 그때 내린 결정이 내게 남겨 준 것은 있다. 그 잘난 석사 학위? 그것은 종이 한장으로 남았을 뿐, 그보다 더 큰 것은 따로 있다. 첫 학기 첫 시험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한 뒤 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겨워 찔끔 흘렸던 눈물이 그것이다.

 

중학생이나 흘릴 법한 눈물을 나이 마흔 셋에 흘렸던 것은 내가 비록 뒤늦게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만큼 절실하게 매달려 있었다는 방증이었기에 내게는 소중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다.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인생을 살더라도 그런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